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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미술가들, 아틀리에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다.

 

 

 

 

 

 

 

얼마 전 후배가 속해 있는 미술가단체에서 그들의 아틀리에를 일반인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 흔하지 않은 기회를 그냥 넘길 수가 없었죠. 마침 딸 아이는 학교 친구의 생일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갔고, 아들 녀석만 데리고 구경을 가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남편도 그 날 당직이 없는 날이라서 편안하게 다녀왔습니다. ^^

 

각자 개성이 강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개인의 아틀리에를 공개하면서 작품을 같이 전시하는 일종의 전시회였습니다. 참신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전시회였습니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문화생활 이라고나 할까요? ^^ 이웃분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열심히 사진으로 담아는 봤습니다. 촬영여부를 작가들에게 일일이 물어보고 찍었는데, 일부 작가는 찍는 걸 원치 않더군요. 충분히 이해 되는 일이지요~ . 이 사진들은 모두 허.락.을 받고 찍은 것들 입니다.^^ 구경 해 보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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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내별meinstern

연하의 남편왈, 넌 왜 남편인 나한테 다른 한국사람들 처럼 오빠라고 안 불러?

 

 

 

 

오늘은 남편이 좀 일찍 퇴근을 했습니다. 마침 저녁을 준비 하고 있던 중이라 남편을 부엌으로 불렀죠.

마치 한석봉의 어머니가 된듯 "난 된장국을 끓일 테니, 넌 채소를 좀 다듬어줘~" 라며 일을 시켰습니다.

얼마 전 부터 가능하면 남편에게 부엌일을 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함께 음식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그 동안 상차리는 것은 도와줬었지만, 직접 부엌에서 음식하는 것은 돕지 않았거든요.

신혼 초엔 가끔 스파게티도 직접 만들어 보고 했었는데....나중엔 제가 못 하게 했습니다.

말이 날 돕는 거지....이건 음식 한 번 하면 온 부엌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으니.....ㅜ.,ㅜ

결국은 제 일이 더 많아 지는 겁니다.

 

그래서  정중히 거절했죠. 차라리 밥 먹고 난 뒷정리를 도와달라구요~  

그러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 '엄마는 의례 항상 밥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겁니다....ㅜ.,ㅜ

특히, 아들녀석에게 '여자는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느 인상을 남겨 줄까 걱정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가능하면 모든 것을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음식도 함께 만들고, 상도 함께 차리고, 뒷 정리도 함께 하고.....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남자의 할 일, 여자의 할 일' 구분 짓지 않고 할 수 있도록 그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서로의 하루를 물으며 열심히 함께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근데, 갑짜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남편이 아이폰을 키는 겁니다. 그리곤 얼마 있다가 라디오에서 한국음악이 흘러 나왔습니다.^^

'한국 방송을 들으면서 음식을 만들면 더 맛있을 것 같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내~참~

 

잠시 후 음악이 끝나고 라디오 DJ가 청취자의 사연을 읽어 줍니다. 가만히 이 것을 듣고 있던 남편이 뭔가 생각이 났는지,

 "와이프, 근데 넌 왜 나한테 오빠라고 안 불러? 다른 한국 사람들은 다 남자 파트너에게 오빠라고 하잖아?"

"엥? 뭔 소리?"

"아니~ 한국 여자들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에게 오빠라고 하잖아~. 근데, 넌 왜 나에게 오빠라고 안 하냐고~?

오빠~ 해 봐!" 하는 겁니다.

내 참~ 기가차서.....

남편이 저 보다 어리거든요~ . 근데, 저 보고 "오빠~" 하라는 겁니다.....ㅜ.,ㅜ

"여보세요, 아저씨? 내가 댁보다 나이가 많거든요~! 오빠라니....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히려 아저씨가 나 보고 '누나~' 해야 되거든요.....!

 

뜬금없이 '오빠타령'을 하기에 이유가 뭘까? 생각해 보니, 좀전 라디오 청취자의 편지 내용중 '오빠'라는 말이 나 온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궁금했었는데, 마침 그 단어가 나오니 물었던거죠.^^;;

신랑 귀엔 그 말의 어감이 좋았나 봅니다. 오빠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그저 '여보~'정도로 생각했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이 어린 신랑에게 '오빠~'라고 할 수 있겠어요!^^

 

 

 

 

 

오빠 소리가 듣고 픈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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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내별meinstern

유학시절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었던 죽음

 

 

 

 

제 인생에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크나 큰 충격을 준 두 가지의 사건을 뽑자면,

고 노무현대통령님의 서거와 고 김광석씨의 죽음이었습니다.

오늘은 고 김광석씨에 관해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사진 출처, Google)

김광석의 추모음반을 낸 독일 힙합그룹 Die Orsons

 

 

 

1995년 말 독일로 건너와 한참 언어와 외로움으로 힘들어 할 때 쯤, (그러니까 1996년 1월달이었네요)

김광석씨의 죽음을, 함께 온 다른 유학생을 통해서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지요!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습니다.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자살'이라는 단어가 지금처럼 그렇게 흔하게 들리는 단어가 아니었기에 도저히 믿기지가 않더군요.

혹, 사고사라면 모를까....자살이라니....

다음 날 동생과의 통화를 통해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너무나 슬펐습니다....

 

왜 자살을 했을까? 무엇이 그를 자살로 까지 몰고 갔을까?.......

지금은 우울증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엔 몰랐었죠.

그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니, 동생이 김광석의 '학전공연 실황 테이프'를 보내 줬습니다. 당시만 해도 CD가 막 나오던 시절이라, 저에겐 CD플레이어가 없었죠. 그런 저를 위해 CD를 카세트테이프에 복사해서 보낸 것 입니다.

3평 조금 더 되는 좁은 기숙사 방에서 그 노래를 들으며 얼마나 울었던지.....ㅠ.,ㅠ

특히 '서른즈음'에를 들을 땐 당시 유학시절의 제 감정이 이입 되어 가슴을 후벼파는 듯 아팠습니다.

당시의 힘들었던 유학생활을 김광석의 죽음에 투영시켜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엄청 울었습니다. 울고 또 울고.....끝없이 울었습니다. 

 

이 후 이 학전공연 실황 테이프는 제가 있던 도시의 거의 모든 한국유학생들의 기숙사 방에서도 울려퍼졌습니다.

우린 돌아가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습니다.

영혼을 울리는 그의 노래는 당시 우리에겐 최고로 강한 처방약이었지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의 갑짝스런 자살이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어떤 약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깊은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만이 우리의 상처를 다독여 줄 수 있었죠.....

 

전 아직도 그의 목소리에서 치유를 받고 있습니다. 힘이 들때는 또 힘든대로 위로를 받고, 기쁠 땐 또 그 기쁨을 배가 시켜 행복하게 합니다. 이런 저 때문에 신랑도 김광석을 알게되었고,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습니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는 함께 소리 높여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노래를 다 좋아합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 했을 때 김광석의 추모 앨범을 사오기도 했죠.

근데, 신랑은 이 추모 앨범보다 '학전공연 실황' 버전을 더 좋아 합니다. 목소리에서 전해 지는 '영혼의 울림'이 다르다고 하네요.^^

노래 가사의 내용을 다 이해 할 수는 없지만, 그 노래에 담겨 있는 '슬픔의 미학'은 공통언어인가 봅니다.

 우리 연애시절, 신랑 친구들과도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듣곤 했었는데, 대부분의 반응이 비슷했습니다.

가사를 번역해 주며 함께 음미하기도 하고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성토하기도 했었죠......

또 얼마 전엔 독일의 힙합그룹 Die Orsons이 유튜브를 통해 우연히 알게된 김광석의 노래에 감동을 받아 추모곡 Kim Kwang Suk 을 만들어 부르기도 했죠.

 

한국국민들의 슬픔이 최고치였던, 지난 2009년 노무현 대통령님이 서거 하셨을 때......

김광석의 노래는 작은 위안이면서도, 슬픔을 더욱 고조시키는.......말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그 무엇'이었습니다.

누군가 그랬던가요? '김광석의 목소리는 포유동물이 낼 수 있는 가장 슬픈 소리'라고.

저도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어떠한 설명도 필요치 않는 '그의 음색자체'가 바로 '슬픔'인 것을.....

오늘 유난히 더 그가 보고 싶네요.....ㅠㅠ

 

 

 

 

(사진 출처, Google)

 남은 자들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속의 그는 그저 웃고만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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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내별meinstern

친정 엄마의 한 마디! 도.둑.년!!!

 

 

 

제가 그나마 자주 보는 한국 방송중에 '자기야'라는 프로가 있습니다.

유명인 부부가 나와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솔찍하게 나누는 프론데, 첫 회부터 즐겨 보게 되었죠.

남과 남이 만나서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다보니, 이것 저것 부딪히는 일들도 있고,

특히 문화와 환경이 다른 곳에서 자랐던 두 사람이 만난 경운 더 할 겁니다.

그러다 보니 이 프로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 들 부부관계를 통해 우리 부부 관계를 되짚어 보며 반성도 하고 또 '화성인 남자'들을 좀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죠.

어젠 배우 변우민씨가 나왔는데, 아내와의 나이차이가 19살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연하의 남편과 살고 있지만.....와우~ 좀 놀랐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인터넷 뉴스에 그런 변우민의 이름 앞에 '도둑'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더군요.

이 단어를 보는 순간, 저의 친정 엄마가 생각났습니다. 저의 엄마도 저에게 처음에 '도둑년'이라고 하셨거든요.

전 남도 아닌 친청 엄마에게서 그런 소릴 들었습니다......^^;;

 

 

 

 

 

 

 

결혼하자는 남자가 있다고 엄마에게 전화로 처음 고백하던 날.

엄마가 묻습니다.

 "독일놈이냐? 한국사람이냐?"            "독...일 사람!"

"뭐 하는 놈인데?"                            " 의대생..."

"몇 살인데?"                                   "....좀.... 어려......"

"뭐...? 그렴 몇살인데?"                    " 나 보다...7....살 어려...."

그랬더니 친정 엄마의 즉각적인 한 마디.

" 이런~ 도둑년!!"

 

나이 서른이 다 되어 하라는 결혼은 안 하고 공부하겠다고 그렇게 반대하는 유학을 가더니,

공부는 마치지도 않고 그 것도 '외국놈'이랑 결혼을 하겠다니....엄마도 기가 차셨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신의 딸에게 '도둑년'이라고..... 

혹, 남자친구의 부모님이 그런 말을 했다면 또 모를까....^^;;

 

결혼 하고 한 참이 지나서 제가 엄마께 여쭤봤죠. 그때 왜 그런 말을 하셨냐구요.

너무 좋아서 그려셨답니다......ㅜ.,ㅜ

'서른 중반에 아직도 저렇게 공부하겠다고 있는 노처녀를 나이도 많이 어리고, 게다가 직업도 좋고....어찌 안 좋을 수가 있냐'구요.

너무 좋은데, 사위 될 놈한테 너무 미안해서...그래서 그랬다고 하시더군요......ㅜ.,ㅜ

이미 독일로 유학 간다고 할때 마음을 접으셨다고 합니다. '독일놈이든, 한국놈이든....좋은 짝만 제발 만나라'...

그러니, 엄마는 너무 좋으셨던거죠~

 

첫째 사위 김서방, 둘째 사위 박서방, 세째 사위 권서방 처럼, 네째 사위는 백서방(신랑의 이름이 백씨와 비슷하게 발음이 되어) 미하엘이라 부르십니다.^^

아직 신랑의 한국말이 많이 서툴려서 장모님과 깊은 대화는 못 나누지만, 장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답니다. ^^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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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내별meinstern